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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325 작성일: 작성자: 전윤주 / 조회 1,832
노자의 계율 '아는 체하지 말 것'에 대한 짧은 생각.

저의 짧은 답글입니다. 저의 생각입니다. ^^;

짧으나마 저도 조금은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기에...,

===============================

[識]

확실하고 근거가 있는 인식. 단순한 신념 또는 억견(臆見)과 구별한다. 지식의 성립근거를 캐는 것은 인식론의 주업무이나, 일반적으로 지식이 지식으로서 성립되기 위해서는 전제로서 무엇인가 확실한 진리가 있고 거기에서 타당한 절차를 거쳐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전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서 회의론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이성론은 전제가 되는 확실한 진리가 이성에 의해서 제시된다고 보고, 마치 이것을 공리(公理)로 해서 다른 여러 지식이 정리(定理)처럼 도출된다고 보는 데 비해, 경험론은 최초의 전제로서 감각적 경험만을 인정하고 통상의 모든 지식은 모두 그 위에 구축된다고 한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은 단지 억견만을 줄 뿐이며, 본래의 확실한 지식은 이것과는 별도의 원천을 가진다고 하는 견해도 플라톤을 비롯하여 철학사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다. I. 칸트는 감성의 형식과 오성(悟性)의 범주에서 선천성을 인정함으로써, 경험과 함께 시작하지만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의 기초를 다지려고 하였다. G.W.F. 헤겔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 등은 각기 지양해야 할 모순을 포함한 변증법적 여러 단계이며, 최종적으로는 절대지(絶對知;absolutes Wissen)에서 종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변증법적 견지는 지식을 외적 실재의 모사·반영이라고 보는 변증법적 유물론자에게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논리·언어·정보 개념 등의 과학적 정밀화가 이루어지고 이에 수반해서 지식의 문제에도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있으나, 여러 형태로 고전적인 문제가 부활되고 있다.


이상이 識(식)이고 아래는 慧(혜)의 백과사전의 의미입니다.

 

[慧]

세계 전체를 의미 있게 하는 근거와 관계되는 통일적인 지(智)로서 사물의 도리나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 인간은 세계에서 다양한 것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자기(自己)일 뿐이며, 이 하나뿐인 자기를 근거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것 중의 하나인 지(즉 지혜)와 관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과학과 구별되는 철학의 존부(存否)는 인간에게 있어서 지혜의 존부와 관계되고, 인간에게 있어서 어떠한 지혜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지혜라는 말이 널리 일을 처리하는 기술적인 지(智)를 의미하였다(피리부는 智, 목공의 智). 법률 제정의 지, 시작(詩作)의 지가 지혜라고 여겨질 때 지혜는 만물과 관계되는 보편적 지가 되고, 모든 것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가르치는 교사(프로타고라스·고르기아스)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졌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만물의 지가 과연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함께 철학의 지는 신의 지혜와는 구별되면서 지혜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지혜의 존재양식을 묻는 비판적 지로서 성립하였다. 중요한 것은 무엇 하나 알지 못하므로 바로 그와 같이 알지 못한다고 깨닫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가능(唯一可能)한 지혜이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智;philosophia)의 영위(營爲)가 바로 이것이다. 그 이후 철학은 지혜와의 긴장에서 인간에게 가능한 지혜의 존립을 문제삼게 되었다. 종교학적으로 본다면, 지혜란 우주·자연의 원질서(原秩序)를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생활을 질서 있게 하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고대 그리스사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지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의 상(相)으로 바라보는 순수한 지>라고 보았다. 유대교에서의 지혜란 신의 계획에 대한 신앙적 통찰을 의미하며, 그리스도교에서외 지혜지식을 초월한 최고의 지혜인 상지(上智)이다. 고대 인도사상에서는 산스크리트의 프라즈냐(prajñā), 팔리어의 파냐(paññā)라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불교의 지혜는 반야(般若)라고 번역하며, 보살의 수행도(修行道)인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십바라밀에서는 반야바라밀로서 가장 주된 수행도라 여기고 있다. 그것은 일체의 현상(現象)과 현상의 배후에 있는 이법(理法)을 아는 마음의 작용이며, 존재 전체의 진실상(眞實相)을 일순간에 파악하는 직관지(直觀智)를 말한다. 분석판단 능력과 달라 가장 깊은 뜻의 이성(理性)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식과 혜의 사전적 의미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식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식은 조금 먼저 알고 있는 것이고 조금 먼저 알았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혜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것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지혜가 있는 사람)은 남의 것(지식)을 내 것인 양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을 합니다.

남의 것이 자신의 것 인양 하는 것은 만약 남의 것이 거짓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빠지고 이것을 전하는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일 경우에 그 사회적 파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남의 것이면 조용히 지내라...?^^; 대충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례로 이름을 대화로는 실명을 거론할 수가 있겠지만 글로는 조금 적는 것이 그렇지만 방송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식이 아주 깊고 폭 넓은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방송에서 아주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공부를 하신 분들이 그 식이 대단하신 분에게 태클을 걸었다고 합니다. 다 줄여서 간단하게 표현을 하면 그때 그분들이 하신 말이 “니 것 내놔 봐라!, 니 것!, 남의 것 말고 니 것 말이야, 앵무새처럼 조잘 조잘거리지 말고 니 것을 내놔봐!”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X나게 열 받아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티베트로 공부를 하러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로 갔다고 하는데 가져왔는지 구해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고 합니다. ㅋㅋㅋ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셋째의 아는 체하지 말 것...이라는 부분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오승연님께서 쓰신글==================================================================

 

노자의 인간관계론 오계율 중 세째 계율은 '아는 체하지 말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너무 아는 체하지 말고 잠자코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부연 설명이 되어 있었지요.

 

저는 이 글귀를 읽고는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아는 체하다'는 무슨 뜻일까?  어떤 의미이길래 아는 체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일까?

그래서 '아는 체하다'에 '체하다'의 의미를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았지요.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는 태도가 있다. 양하다.'
그렇다면 '아는 체하지 말라'의 사전적 의미는 '잘 모르면서도 아는 듯이 거짓으로 꾸미지 말라'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세째 계율의 부연설명에 의하면 사전적 의미에서의 '아는 체'를 금하는 것에 중점을 둔 건 아니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여기서 '아는 체하다'의 뜻은 '자신을 드높이려는 마음(예를 들면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자의 계율 '아는 체하지 말라'의 의미는 '자신을 뽐내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어차피 뽐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도의 삶과는 거리가 멀고
잠자코만 있으면 세상 시시비비에 휩싸이지 않게 되니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노자의 생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열심히 하시는 육임회원들 중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육임식구들 뿐만 아니라 제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을 찾아 보기 힘들어요.

 

 

요즈음에는 오히려 순수한 마음으로 정보를 전달하려는 사람을 놓고 아는 체한다, 잘난 척한다 라고
듣는 상대방 입장에서 마음대로 규정지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요.

 

그래서 저의 경우 노자의 '아는 체하지 말라'라는 계율도 지식 전달자인 자신의 교만한 마음이 일어남을 살피라는 의미보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그의 아는 바를 전해 줄 때 듣는 입장인 자신의 일어나는 마음을 잘 살펴보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이상 저의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노자의 사상을 접해 본 적 없는 문외한인 제가 노자의 생각을 제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부디 교수님들,선배님들! 노자 사상에 대해 종종 글 좀 올려 주셔셔 가르침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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