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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383 작성일: 작성자: 전윤주 / 조회 1,420
베드타임스토리

자아란 어떤 의미일까요? 나는 자아를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관념, 기억, 결론, 경험. 분명히 명명할 수 있는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의도,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거나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 무의식 속에 축적된 기억, 민족, 집단, 개인, 또는 종족의 구별과 상관없이 과거에 축적된 기억. 이런 것이 행위로서 외부에 투영된 것이든, 또는 덕으로서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 그리고 이들 모든 것을 구하려는 노력 자체가 자아인 것입니다. 이 자아 속에는 경쟁심이나 뭔가가 되려고 하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신 활동 전체가 자아입니다.
 
우선 경험이 어떻게 해서 자아를 강하게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다면 이 경험 문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경험이란 어떤 의미 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상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반응도 하고 행동도 합니다. 이런 때 우리는 언제나 타산적이고 교활합니다. 객관적으로 눈에 비친 것과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 사이에, 그리고 의식적 기억과 무의식적 기억 사이에는 부단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의 기억에 따라서 나는 내가 본 것이나 느낀 것 모두에 대하여 반응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알고 있는 것, 또는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 과정에서 경험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눈에 비친 것에 대한 반응이나 반동이 경험입니다.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반응합니다. 그리고 그 반응에다 어떤 이름을 붙이는 것 그것이 경험인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서만 여러 가지 욕망이 투영됩니다. 즉, 나는 누군가에게 무사히 보호를 받거나 정신적인 안정을 얻으려고 합니다. 또한 나는 스승이나 지도자 신 같은 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투영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일정한 형태를 가진 욕망, 자기가 이름 붙인 욕망을 나는 투영하여 그것에 대하여 나는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투영이며, 내가 이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경험을 준 그 욕망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나는 경험했다, 나는 그 스승을 만났다, 나는 그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등으로.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의 경험에다 우리가 이름 붙여가는 과정의 전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고요한 정신이나 침착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나 그 밖의 성전에 이런 말이 쓰여 있기도 하고, 많은 성인이 그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마음이 하루종일 쉴 새 없이 지껄이고만 있기 때문에 때때로 나 자신도 마음이 평온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충족된 평온한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훌륭하고 기쁜 일일까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의 욕구는 정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평온한 마음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그 평온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묻습니다. 나는 명상에 대하여 쓴 책을 이것 저것 알고 있으며 여러 가지 훈련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훈련으로 정적을 체험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정적의 경험 속에서 자아, 또는 나라는 것이 확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자아를 투영한다든지, 욕구한다든지, 경험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자아로부터 생긴 경험이 부정적인 것이며 파괴적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경험을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다 적극적인 생활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험과 생활방법은 모두 해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당신에게 있어서는 자기부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개인으로서의 당신과 나는 자아의 근원까지 소급해서 그 활동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자아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자아가 소멸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내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할 때 분명히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자아가 강화될 수 있는 경험을 이미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이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이해력과 깊은 주의력과 기민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눈을 떼지 말고 자아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단히 진지한 나는 이 자아를 소멸 시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자아를 소멸시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소멸시키고 싶다 라고 말했을 때 거기에는 아직도 자아의 경험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아는 또 다시 강화되는 것입니다.
 
정신의 활동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실제로는 나를 강화하는 경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신이 인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능한 일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정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 정적은 자아에 의하여 체험 되는 것이 아니며 자아를 강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자아의 전 과정 즉 자아가 갖고있는 교활하고 비범한 발명의 재능과 지성 또는 자아가 동일화, 덕, 경험, 신념, 지식 등으로 자기를 은폐하는 사기술을 볼 때, 혹은 정신이 하나의 울 안에서 움직인다든가 자기가 만든 새장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이 정신의 활동을 관찰해서 완전히 그 활동을 알게 되었을 때 당신은 대단히 평온해지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 평온함은 강제나 보수나 혹은 공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의 모든 활동은 단지 자아를 강화하는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이해했을 때 또한 활동하고있는 정신을 완전히 아는 동시에 관념이나 언어나 투영된 경험에 의하지 않고 당신이 진정으로 그 핵심에 이르렀을 때 그때 당신은 정신이 완전히 정지되어 더 이상 창작할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신이 창작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원 안에 있으며 자아의 영역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이 창작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인식작용이 아닌 참된 창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과 나가 한 개인으로서 자아의 전체적인 활동을 알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자아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는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는 사랑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이나 경험 자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신이 사랑을 알았을 때 그때는 자아가 소멸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상가(thinker)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는 생각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생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사상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이 내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이다. 동시에 나는 커뮤니케이션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이 우스꽝스러운 길을 가고있는 것일까? 생각을 통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일깨우는 것이 내 방식이다.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이 고통이 끝나야 한다. 어떻게 이 고통을 끝낼 수 있을까? 내가 제안하는 바는 전통적인 접근 방식에 어긋난다. 인도와 서양의 종교적 접근 방식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같은 현대적 접근 방식에도 어긋난다.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거나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내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주된 목적은 그들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들을 침묵의 상태로 밀어넣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 침묵 안에서 무엇인가 가능해진다. 아니,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가 들으려고 한다. 그들은 확고한 신념과 사상을 갖고 와 주장을 평치고 나와 토론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접근방식을 무산시킨다.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 모두는 마음에 대해 말한다. 종교적인 사상가들, 심리학자들 모두가 마음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내가 말하는 존재의 상태를 그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종교든, 과학이든, 심리학이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내가 묘사하고자 하는 존재의 상태에서는 아무 노력도 필요없다. 나는 그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로써 이 자리에 존재한다.
 
어쨌든 인류는 그럭저럭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주에는 절대로 오염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순수 의식, 절대적으로 청정무구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 의식은 그 궤도권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대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가 지구의 어느 구석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이 의식은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 의식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경계선도 없고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내가 소위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을 일종의 '폭발'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폭발은 반드시 인류 전체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을 측정할 수는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폭발의 영향을 받았는지 측정하고 산술적으로 통계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폭발의 영향은 아주 점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을 요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의식이 무제한적으로 누구에게나 폭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 의식과 접촉한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여 어떤 결과치를 산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의식과 접촉했다고 해서 누구나 폭발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폭발은 백만 명 중에 한 사람에게만 일어날 정도로 희귀하다. 그가 무엇을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다. 그저 그런 폭발이 일어날 뿐이다. 그대는 이것을 하늘의 은총, 또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댓글달기가 어렵워서..., 읽다가 지우고 읽다가 지우고..., 읽은 글 가져다가 붙이고 지우고...,

결국 과거에 즐겨찾기 해두었던 사이트에 들어가서 글을 가져다가 답글로 붙여봅니다. ^^;

역시 전 글재주가 없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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