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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438 작성일: 작성자: 서경 / 조회 1,631
눈물의 850원
 

난 어릴 적부터 가난했다. 아니 가난한 것 같았다. 아빠는 없었고, 엄마와 나 단 둘이 살았다. 언니가 있긴 했지만 언니는 아빠 밑에서 자랐고 나만 엄마랑 살았다.

엄마는 한 달에 두 번 쉬는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해 가며 나를 키웠다.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엄마가 항상 자랑스럽다.


내가 시집가던 날, 엄마는 나를 차마 웃으며 보내지 못했다. 결혼식도 못한 결혼. 모은 돈 모두 엄마 두 손에 꼭 쥐어주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을 삼키며 남편만 믿고 시집왔다. 그때 내 나이 22살.

내 처지에 세상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이런 남자 없을 거라며 자신 있게 시집왔다. 물론 지금도 남편은 나에게는 ‘날개 없는 천사’다.

혼수 하나 없이 시어머니가 쓰던 전기제품 쓰면서도 신혼의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몰랐다. 시어머니가 뇌출혈 환자여서 수술할 적에 집안에 십 원짜리 한 장 없어 신랑 적금을 깨고 그것도 모자라 대출받고, 시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나에게 욕을 할 적에 시집보낸 시누이의 혼수 빚이 시어머니 카드 빚이라는 것을,

모두 갚아야 할 돈이 3천만 원이 넘는다고 할 적에 난 도망가고 싶었다.

아니,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해 주는 신랑을 뒤로 하고 옷가지 하나 없이 집을 나왔다. 단돈 7천원 들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갈 곳이 없어 엄마에게 눈물 보이고 싶지 않아, 역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때

술에 취해 나를 알아보고 마구 욕을 하는 시아버지를 만났을 때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신랑한테 당신을 만난 게 내 최대 실수라고 너 같은 거 보기도 싫다고 내 인생 니가 망쳐놨다고 악쓸 때, 덩치는 곰 같은 사람이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빌던 내 남편.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이내 작아져서 사랑하지만 보내주겠다고, 성공하면 다시 시작하자고 눈물 콧물 흘리며 내 짐을 직접 싸주던 천사 같은 남편.


난 그날로 결심하고 나쁜 며느리, 독한 마누라가 되었다.

평생을 설거지통에 손 담갔던 우리 엄마 호강도 시켜주고 싶었고 시어머니의 수술비 내가 다 댔노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고, 시아버지 알콜중독 내가 완치하였노라고 큰소리도 치고 싶었고, 우리 시누이 내 손으로 시집보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남편. 제일 불쌍한 우리 남편, 마누라 잘 만났다는 소리도 듣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카드를 짤라 불 질러버리고 다달이 얼마씩 카드 값 상환하겠다고 은행가서 빌었다. 술에 쩔은 시아버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남편 적금 해약하고 대출금 싹 정리했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여우같은 며느리가 시어머니 잡는다고. 멀쩡한 시아버지 정신병원에 넣고 잘 산다고. 버르장머리도 없고 싸가지도 없다고. 하지만 눈감고 귀닫고 입닫았다.

내 남편 그때 나이 23살. 육군 하사. 차 떼고 포 떼고 받는 월급 90여만원. 별다른 재주없던 나는 조그만 회사 경리. 세금떼고 받는 월금 90만원. 둘이 합쳐봐야 180만원.

 아버님 병원비 한달 55만원. 어머님 카드값 상환비 50만원. 적금 30만원. 이렇게 남은 돈 45만원으로 한달 살았다.


 45만원. 정말 돈도 아니더라. 두 사람 휴대폰비 10만원, 수도세 전기세 관리비 합치니 또 10만원, 나머지 25만원으로 살았다.

가끔 설, 추석때 나오는 보너스 모아 적자나는 달에 땜질했다.

정말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거다. 내 생에 가장 비참한 생활이었다.

쌀이 없어 친구네집 가서 쌀 얻어 오고. 반찬없어 한 달내내 쉬어빠진 김치에 밥 먹은 적도 있었다.


그나마 그건 나은 날이고. 쌀이 아까워 나는 다이어트 한답시고 굶고,

남편은 부대에서 저녁까지 먹고 왔다.

가장 힘들었던 날은 남편 생일이었다. 오래간만에 사치하며 미역국에 소고기 넣고 끓여 줄려고 탈탈 털어 시장 봐 왔는데 가스가 뚝 떨어졌다.

도시 가스가 아니라 가스통을 갈아야 하는데 통장에도 돈이 없고 가진 돈도 없었다.

 그 당시 세 정거장 거리에 회사직원이 자취를 했는데 냄비 들고 가서 미역국을 회사직원 집에서 끓이고 다시 세 정거장을 뜨거운 냄비 들고 행여 식을까봐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집에 온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난 미역국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게 1년 정도를 살다 운 좋게 시집 친척들이 도와줘서 카드 빚과 대출금을 갚았다. 결혼생활 1년이 조금 넘어 신랑이 중사로 진급하고 나도 회사 옮겨 생활이 나아졌다. 결혼생활 1년 동안 누가 쓴지도 모르는 부대에서 쓰던 싱글침대에서 살다가 난생 처음 침대를 샀다.

침대 가격에 5만원 더 얹어주고 뺏다시피 가져온 화장대도 있었다.

내게 제일 행복했던 날이다. 처음 그 침대에 누워 잠 잘때 침대가 다칠까봐 조심조심 자고 했던 기억. 혹시 화장대가 다칠까봐 서랍조차 잘 열지도 못했다.


그때까지 몰랐다. 남자 지갑에 비상금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나만큼 우리 신랑도 엄청 힘들다는 것. 결혼 3년동안 회식 한번 안가고 사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도 쓰고 싶은 것 못쓰니까. 옷 한 벌 살 수 없으니까.

친구 한번 맘 편히 만날 수 없고. 생일조차 챙길 수 없다는 것을. 내가 그러니까 남편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6개월 전 남편 군복이 더러워 빨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동전 850원이 떨어다. 동전을 집어 들고 신랑을 한번 쳐다보는데 내 손에 있는 동전을 가져가며 저금통에 넣는다.

 그리고 말했다.“오늘 부대에서 행정보좌관님이 나보고 커피 한 잔 뽑아오라고 하는거야. 돈 한푼 없는데 차마 돈 없다는 말이 안나와 지폐밖에 없다고 하니까 동전으로 바꿔 준대잖아. 그래서 지갑 깜박하고 안가져 왔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오늘 증명사진낼 때 지갑에서 꺼냈지 않았냐고. 자기한테 커피 사주는 게 아깝냐고 하데.

 솔직히 말했어. 사실은 돈이 없다고. 행정보좌관님이 우리 사정 잘 알잖아.

 아무 말없이 천원 주시면서 일주일 동안 커피 마음대로 뽑아 먹으라고.

 우리 부대 커피값 150원이잖아. 그래서 1잔 빼고 남은 돈 저금통에 넣을려고 가져왔어.나 커피 별로 안 좋아 하잖아.

그 말 듣고 주저앉아 울었다. 막 눈물이 나왔다.속이 상해 울었다.


 20만원씩 부었던 적금을 만기 3달 앞두고 깨버렸다.

겨울파카 하나 없는 남편에게 6만9천원짜리 오리털잠바 하나 사 줬다.

고물같은 컴퓨터도 할부 6개월 끊어 100만원짜리 컴퓨터로 바꿔 줬다.

그날 밤 난생 처음 소갈비를 먹었다. 1인분에 3만 2천원이나 하는 소갈비를.

남편에게 용돈도 5만원 줬다. 신용카드도 건내 주면서 쓰고 싶은거 쓰라고.

이제 돈 많다고. 더이상 가난하지 않다고.


우리 남편이 두 달짜리 파견근무를 나갔다.

어제 퇴근하고 집에 오니 상자 하나가 있었다. 남편이 보낸 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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