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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374 작성일: 작성자: 전윤주 / 조회 1,633
茶半香初(답글로)

글을 찾아보다가 초의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몰라서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자료가 많아서 댓글보다는 답글이 나을 것 같아서 답글로 대신 합니다. 초의선사는 차와 시와 선에 대한 사상으로 표현을 하고 있더군요.

=== 차 ===

 

선사의 차사상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면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리라. 먼저 동다송(東茶頌)을 통해 본 선사의 다도관(茶道觀)과 다신전(茶神傳)을 통해 본 차생활과 그리고 다시(茶詩)를 통해 본 차정신일 것이다.

동다송은 초의선사가 차를 알고자 해서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海居道人 洪顯周)에게 지어서 보낸 차의 전문서이다. 동다(東茶)라는 말은 동국(東國) 또는 해동(海東)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말한다. 이 차를 게송(偈頌)으로 읊었다고 해서 동다송이라고 했다.

이 동다송의 대의(大意)를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첫째로 차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좋은 약과 같은 것이니 차를 마시도록 해라. 둘째로 우리나라 차는 중국차에 비교해서 약효나 맛에 있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육안차(六安茶)의 맛이나 몽산차(蒙山茶)의 약효를 함께 겸비하고 있다. 셋째로 차에는 현묘(玄妙)하고 지극(至極)한 경지가 있어 다도(茶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초의선사의 다도관(茶道觀)이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동다송 제29송에서 말하기를,다도란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라고 했다.

' 평해서 말하기를 채다(採茶)는 그 묘(妙)를 다해야 하고, 조다(造茶)는 그 정성(精誠)을 다해야 하고, 물(水)은 그 진(眞)을 얻어야 하고, 포법(泡法)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체(體)와 신(神)이 서로 고르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을 일컬어 다도(茶道)에 이르렀다고 한다.(評曰 採盡其妙 造盡其精 水得其眞 泡得其中 體與神相和 健與靈相倂 至此而茶道盡矣)'

선사의 다도관을 알고자 한다면 문(門) 행(行) 득(得)의 길을 거쳐야 한다. 대저 문이 있어서 들고 행(行)해서 얻는(得) 법이다. 4문(四門)이 있으니 채(採) 조(造) 수(水) 화(火)가 그것이며, 행에는 4행(四行)이 있으니 묘(妙) 정(精) 근(根) 중(中)이 그것이며, 득에는 4득(四得)이 있으니 신(神) 체(體) 건(健) 영(靈)이 그것이다.

4문의 채란 채다(採茶)를 말하며 조란 조다(造茶)를 말하며, 수란 수품(水品)을 말하며 화란 화후(火候)를 말한다. 4행의 묘는 채다의 현묘(玄妙)함을 말하며 정은 조다의 정성(精誠)스러움을 말하며, 근은 수품의 근본(根本)을 말하며, 중은 화후의 중화(中和)를 말한다.

4득은 진다(眞茶)와 진수(眞水)를 얻어야만이 얻을 수 있는데, 차(茶)는 물(水)의 신(神:정신)이요 물은 차의 체(體:몸)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그 신(神)이 나타나지 않으며 진다(眞茶)가 아니면 그 체(體)를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체와 신이 비록 온전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중정(中正)을 잃으면 안된다. 중정을 잃지 않으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다. 신(神:정신)과 체(體:몸)는 기(機:기틀)와 용(用:작용)과 같고, 건(健:건전)과 영(靈:신령)은 이(理:이치)와 묘(妙:현묘)와 같다. 그러므로 신(神:정신)이 건(健:건전)하면 기(機:기틀)가 이(理:이치)하고, 신(神)이 영(靈:신령)하면 기(機)가 묘(妙:현묘)하고, 체(體:몸)가 건(健)하면 용(用:작용)이 이(理)하고, 체(體)가 영(靈)하면 용(用)이 묘(妙)하다.

신(神)과 체(體)는 기(機)와 용(用)과 같아서 불이(不二)해야만 건(健)과 영(靈)을 얻는다. 건(健)과 영(靈)이 불이(不二)하면 묘리(妙理)하고, 묘리하면 묘경(妙境)하고, 묘경하면 묘각(妙覺)한다.

채다(採茶)란 차를 따는 일을 말한다. 차나무에서 차잎을 따는 것은 그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맛이 온전하지 못하고 늦으면 싱그러움이 흩어진다. 곡우(穀雨:4월20일)와 입하(立夏:5월5일) 사이가 적기인데 일창일기(一槍一旗) 이기(二旗)의 잎이 푸른빛이 나거나 쭈글쭈글하거나 돌돌 말린 것이 좋다.

차잎을 딸 때 밤새 구름이 끼지 않고 이슬이 흠뻑 내린 후에 딴 것이 좋으며, 비온 후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따지 않는다. 그리고 계곡이나 암석 사이에서 자란 것이 좋다. 이처럼 채다는 현묘함을 다 해야만 된다. 그 현묘(玄妙)함를 다해서 채취한 차잎을 가지고 조다(造茶)를 하는데 솥이 매우 뜨거워졌을 때 급히 차잎을 넣어 덖어야 한다. 차가 익어서도 안되며 태워서도 안된다. 차가 익으면 빛깔이 검고 타면 노랗고 흰 반점이 생긴다. 이렇게 적당한 열기로 대여섯 번 정도 덖으면 차가 잘 건조된다.

불은 연기가 나지 않아야 되며 불의 기운이 고르게 되어야만 한다. 양질의 차잎과 고르고 순수한 불과 만드는 사람의 정성스런 마음이 합쳐져서 진다(眞茶)가 나오는 것이다.

수품(水品)은 차를 끓일 물을 말하는데, 산마루에서 나는 석간수가 좋고 우물물이 다음이며 강물은 나쁘다. 물에는 8덕(八德)이 있으니, 가볍고 경(輕) 맑고 청(淸) 시원하고 냉(冷) 부드럽고 연(軟) 아름답고 미(美) 냄새가 나지 않고 부취(不臭) 비위에 맞고 조적(調適) 탈이 나지 않는 것 무환(無患)이 그것이다.

물은 그 근본(根本)을 구하지 않으면 상하거나 오염되기가 쉬워서 고여 있는 우물물이나 강물은 쓰지 않는다. 바로 그 근원지에서 솟아나는 샘물이어야 한다.

이 샘물을 구하여 체성이 튼튼한 불로 끓이면 좋은 탕수(湯水)가 된다.

만약 대나무나 썩은 나무가지나 낙엽같은 연료는 불의 체성이 허약하여 탕(湯) 또한 체성이 약해진다. 이런 탕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연기가 나지 않고 체성이 튼튼한 불을 구하여 가볍게 빨리 끓여야 한다.

이때 문(文)이 지나치면 수성(水性)이 유약하게 되고 수성이 유약하면 차가 뒤지고 쳐지며, 무(武)가 지나치면 화성(火性)이 극렬해져서 차를 위해 물이 억제되며 성근 기가 위로 뜬다. 이것을 문무화후(文武火候)라고 하는데 지나치면 모두 중화(中和)를 얻지 못한다. 그 적절함을 다하여 중화를 얻어야 진수(眞水)가 나오는 법이다.

진수와 진다를 얻었을 때 비로소 중용(中庸)의 덕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진다와 진수가 아니면 신과 체를 규명할 길이 없고, 신과 체를 규명하지 못하면 건과 영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진다와 진수를 얻어서 신과 체를 규명하고 신과 체가 불이(不二)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포법(泡法:차 울궈내는 법)을 하는데 포법은 중정(中正)을 지켜야만 한다.

그 요체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차가 많아도 안되고 물이 많아도 안된다. 차가 많으면 빛깔이 노랗고 빨가며, 맛은 쓰고 떫으며 향내도 좋지 않다. 반대로 차가 적고 물이 많으면 맛이 온전하지 않고 빛깔도 엷고 향내도 미숙하게 된다.

적당한 양의 차와 물을 넣어야 한다.

둘째로 다관에서 차를 울구는 시간이다. 너무 빨리 따라내면 맛이 미숙하고 향내도 약하며 빛깔이 엷고 좋지 않다. 반대로 너무 오래 울구면 빛깔도 탁하고 맛도 쓰고 떫으며 향내도 지나치게 된다. 알맞게 울궈야 한다.

세째 차를 잔에 골고루 나누어 따를 때, 너무 급히 서둘러 따르는 것을 급주(急主)라 하고, 게으르고 완만하게 따르는 것을 완주(緩注)라고 한다. 완주나 급주를 해서는 안된다.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적당한 양의 차를 넣어 알맞게 울궈서 적당한 시간에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서 마시는 것이다. 이것을 중정법(中正法)이라고 한다. 중정법을 잘 지키는 길은 마음 속에 중용(中庸)의 덕을 품되 그 팔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적의함을 다하면 중정을 얻게 된다. 중정을 얻게 되면 자연히 신과 체를 규명하게 되고 신과 체를 얻으면 건과 영을 얻게 되는데, 신과 체가 불이하고 건과 영이 불이하면 기용(機用)이 불이하고 기용이 불이하면 묘리(妙理)가 불이하고 묘리가 불이하면 이치가 현묘한 경지에 들어 뜻한 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헤아릴일이 아니로다. 오직 체득하는 데 그 진체(眞諦)가 있으니 진정으로 구해볼 일이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다도관(茶道觀)을 완성한 선사의 차생활과 정신은 어떠했는가. 선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번거로움은 피하고 자유스럽고 검소하며 편안하게 즐기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좋은 차와 좋은 물, 잘 끓여서 중정을 잃지 않은 차를 원했다. 그렇다. 진다와 진수, 그리고 중정을 잃지 않은 차, 이것이면 족한 것이다. 이 외에 더 구할 것이 있다면 거들먹거리는 사람이나 행세하려는 사람일 것이다.

여기에서 선사의 제자인 허소치(許小痴)가 말하는 초의선사의 차생활을 들어보기로 하자.

『바로 그 노장님(초의)이 내 평생을 그르치게 만들어 놓았다고나 할까요. 아주 젊은시절 내가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하고 담적하게 살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을미년(1835년)에 나는 대흥사에 가서 초의선사를 뵈었습니다. 선사가 거처하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무성한 곳에 두어 칸 초가를 얽어 그 속에서 살았지요. 수양버들은 처마를 스치고 작은 꽃들은 뜰에 가득하여 함께 어울려 뜰 복판에 파둔 상하 두 연못 속에 비치어 아롱졌습니다. 추녀 밑에는 크고 작은 차 절구를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선사의 자작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못을 파니 허공 중에 밝은 달이 담궈지고 간짓대를 이어 구름샘을 얻었네.

눈앞을 가리는 나뭇가지를 잘라내니 석양 하늘에 아름다운 산이 저리도 많구나.'

이와 같은 시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선사의 그 청고하고 담아한 경지는 세속인들이 입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양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새벽이나 달 뜬 저녁이면 선사는 고요에 잠긴 채 시를 읊으면서 흥얼거렸습니다. 향불을 피워 향내가 은은히 퍼질 때에 차를 반쯤 마시다 문득 일어나 뜰을 거닐면서 스스로 취흥에 젖어들곤 했습니다. 정적에 잠긴 작은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새들과 상대하고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손님이 찾아올까봐 살며시 숨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초암에 있는 선사의 서가에는 서책들이 가득했었는데 그 모두가 다 연화와 패엽(貝葉)이었습니다. 상자 속에 가득찬 구슬 같은 두루마리는 법서와 명화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초암(일지암)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배우며 시를 읊고 경을 읽으니 참으로 적당한 곳을 만난 셈이었습니다.

더구나 매일매일 선사와의 대화는 모두 물욕 밖의 고상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비록 평범한 세속의 사람이지만 어찌 선사의 광채를 받아 그 빛에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빛을 받고서 어찌 세속의 티끌과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장님이 나를 그르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소치의 말처럼 물욕 밖에서 청고하고 담아하게 살다간 선사의 차생활은 한폭의 신선도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한생을 걸림없이 살다가신 선사의 차정신은 무엇인가. 선사는 그의 다론(茶論)에서 말씀 하시기를 ‘8덕(八德)을 겸비한 진수(眞水)를 얻어 진다(眞茶)와 어울려 체(體)와 신(神)을 규명하고 거칠고 더러운 것을 없애고 나면 대도(大道)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옛부터 성현님네가 즐겨 마시게 되었고 그 성품은 군자를 닮아 사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악하지 않은 차, 이 차는 묘한 근원을 가지고 있어 그 근원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라밀(婆羅密)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바라밀이란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으므로서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것을 말한다. 차를 마시면서 신과 체를 규명하여 건과 영을 얻어 집착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바라밀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현묘(玄妙)한 경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차(茶)이다.

선사는 이와 같이 바라밀에 이르는 길에서 모든 법이 불이(不二)하니 선(禪)과 차(茶)도 불이하고 제법(諸法)이 일여(一如)하다고 했다. 그래서 선사는 차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이같은 선사의 차정신은 ‘모든 법이 둘이 아니니 선과 차도 한 경지니라(諸法不二 禪茶一如)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모든 면에 나타나 선과 차가 둘이 아니고 시(詩)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차와 시가 둘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선의 여가에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차를 마시며 글씨를 썼으니 세인들은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선사는 차를 마시다가 흥얼흥얼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세상사를 잃어버리기도 하며, 정적에 잠긴 난간에 기대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기도 하며, 깊숙한 오솔길을 따라 송림에 걸린 달을 보기도 하고, 향을 사루어 은은히 퍼질 때 차 한잔 달여놓고 무심히 앉아 있으니, 선사의 청고하고 담적한 차생활은 참으로 쉽고 편안하다.

이러한 선사의 사상은 다산(茶山)과 추사(秋史)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니 추사가 선사께 보낸글귀 가운데 이런 사상을 내포한 글이 많이 있다.

명선(茗禪)과 선탑다연(禪榻茶烟) 그리고 정좌 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가 그것이다. 이는 모두 선다일여(禪茶一如)의 경지를 천명한 것이다.

여기에 선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한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깊고도 넓어 가 없는 바다와 같고

중생이 큰 은혜에 의지함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는 것과 같네.

오묘한 이치는 밝고 역역한 것이라,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 하는 것.

어찌 감히 불근(不根)으로써 일찍이 해조음(海潮音)을 듣고서

황망히 군자의 방에 들어가 함께 진리를 말할 수 있으랴.

달빛도 차가운 눈 오는 밤에 고요히 쉬니 온갖 인연이 침노하네

그대는 아는가 무생(無生)의 이치를, 옛날이 곧 오늘인 것을.

 

=== 시 ===

 

스님의 시(詩)는 선시(禪詩)와 다시(茶詩), 그리고 운수(雲水)의 시(詩)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이러한 시상(詩想)에 대해서는 일찌기 여러 선비들이 언급한 바 있다.

그 당시 스님과 교유하던 사대부들은 스님을 시승(詩僧)으로서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시(詩)를 사원에서는 게(偈)라고 하는데, 스님의 게(偈)는 시풍(詩風)이 넘쳐 승속간(僧俗間)에 따를 자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 이름난 학사(學士) 시객(詩客)들과 많은 교유를 했으며, 때때로 모여서 시회(詩會)를 하며 즐겼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시가 대부분으로 이를 한데 모아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라고 제명하여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이 시집 서문에 이르기를 『호남(湖南)의 스님 초의는 학자. 선비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시문은 속성(俗性)을 벗었고 또한 정결 간명하여 마침내 당송(唐宋)의 시(詩)에 출입할 만하니 군더더기가 없고 맑더라. 이 시집 중에는 창려운(昌黎韻) 몇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어질고 곧으며 잔잔하여 주자서(朱子書)와 부합된 바가 많더라』 라고 하였다. 이 서문은 좌의정을 지낸 홍석주(洪奭周)가 쓴 것으로, 전통적인 주자학에 시종(始終)하여 정치, 사회, 경제, 과학등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한 대학자이다.

이처럼 스님의 시풍은 맑고 담아하며 속성을 벗었고 간결하면서 명료했으니 당송(唐宋)의 시풍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을 조선조의 시성(詩聖)이라고 까지 추앙하여 그의 작시법(作詩法)을 배우기도 한 신자하(申紫霞)는 스님의 시집 서문(序文)에서

『스님의 시는 내용이 깨끗하고 잔잔하며 참을성 있게 옛 경지에 몰입 하였더라. 이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 우리 나라의 스님 가운데에도 시인이 많았으나 도중에 끊기더니 이제 의순(意洵)의 시를 얻었도다. 그가 교우하는 사람을 보니 소동파에 버금가는 사람들이다. 이 아니 좋은가. 더욱이 그의 시는 중의 티(소순기 蔬筍氣)를 벗고 시로써 계(戒)를 삼았도다』 라고 하였다.

시의 내용이 깨끗하고 잔잔하며 참을성 있게 옛 경지에 몰입하였으니, 우리나라 시승(詩僧)의 끊어진 대를 이었다. 이러한 스님의 시풍은 승속이 다 좋아 하였으니 만나고 모이면 으례히 흥얼흥얼 시를 읊게 되었고, 또 이러한 시는 그 품격이 뛰어나 뜻이 깊고 맑으며 군더더기가 없고 능소화처럼 홀로 아름다웠다. 이처럼 스님의 시는 깨우치는 바가 많았으며, 정이 넘치고 잔잔하여 피안(彼岸)에 이르렀다.

『 만사는 본래 봄날 눈과 같은 것 뉘라서 알리요,

그 가운데 깍아 없앨 수 없는 일단이 있음을

가을 하늘에 잠긴 맑은 달빛은 그 청화(淸火)함이 깨끗하여 비길데 없구나.

잘나고 못생김을 그 누가 구분했나. 참됨과 거짓이 원래에는 없었던 것

나가정(那伽定)으로부터 아직 움직이기 이전에 누가 향화(香和)의 옛 인연을 맺었다 하나

둘이서 헤어지고 만남이 찾는다고 될 것인가.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붙들을 새도 없구나.

그대 얼굴 한번 보고 또 볼 때마다 기쁘구려 깊고 깊은 정회(情懷)가 더욱 더 하네.

삼십 방망이도 두렵지 않아 한가로이 구름따라 험한 산을 내려와

방장에 계신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우러러 보니 백옥(白玉)의 세계에 황금으로 장엄했네.

옥녀(玉女)가 때때로 하늘꽃을 뿌리는데 문수보살이 들고있는 백연화(白蓮花)로다

밑 없는 바릿대로 향기로운 밥을 받들고 막혀버린 귀로 무언(無言)의 설법을 듣네.

번뇌와 티끌과 때가 붙지 않는 곳 뉘라서 맑은 물에 다시 씻을 것인가.

불이문(不二門) 가운데 삼십 사람이여. 쓸모없는 장광설(長廣說)이로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는가. 최후에 보여 준 이(伊,∴)자의 비유를

가로로도 세로로도 분별키 어려운 것 내 그대의 청을 따라 한마디 하리니

법희(法喜)와 선열(禪悅)로 공양하여 아귀도 제도하리.』

이 시는 지음(知音) 쌍수도인(雙修道人) 김정희(金正喜)에게 보낸 작품이다.

여기에서 스님은 문자선(文字禪)이나 구두선(口頭禪)을 배제하고, 깎아 없앨수 없는 일단(一段:眞理)이 있으니, 이는 최후에 보인 이(伊: ∴)자(字)이다. 이 곳에는 참됨과 거짓이 본래부터 없고, 분별과 헤아림으로 미치지 못하니 번뇌도 떨어지고 티끌도 때도 붙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스님은 선(禪)과 시(詩)가 둘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정신으로 시(詩)로서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수가 있다. 이러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은 비단 시 뿐이 아니라 모든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 선 ===

 

스님의 선(禪)사상은 그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와 「초의선과(艸衣禪課)」에서 찾아 볼수 있다. 사변만어는 당시의 유명한 선(禪)의 중흥조인 백파선사(白坡禪師:1767-1852)가 선(禪)의 종지(宗旨)를 후학들이 알기 쉽게 풀이하여 펴낸 「선문수경(禪文手鏡)」의 선론(禪論)을 반박하기 위해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초의선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선문염송선요소(禪門拈頌選要疏)」라고도 하며, 내용은 선문염송(禪門拈頌)가운데서 일부 선론(禪論)만을 뽑아서 당신의 선론을 추가해 일지암에서 묶어 펴낸 책이다. 이 책은 판본(版本)으로 간행된 적이 없고 필사본만이 전한다. 그러나 스님의 선사상(禪思想)이 가장 잘 나타난것은 선문사변만어이다.

백파선사의 선문수경이 세상에 나온 뒤, 선(禪)의 진의(眞意)가 오도되고, 불타와 달마조사의 근본사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초의스님은 급기야 사변만어를 써서 선문수경의 선론을 논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백파(白坡)스님이 주장하는 삼종선(三種禪), 즉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으로 분류하는 것을 인정치 않고 이종선(二種禪)을 고집하였다. 이종선(二種禪)은 인명(人名)으로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나눌 수 있고, 법명(法名)으로는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사선(祖師禪)은 격외선(格外禪)과 같고, 여래선(如來禪)은 의리선(義理禪)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근원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보니 이 논쟁은 크게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어 송광사에서 우담홍기(優曇洪基:1822-1881)가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써서 백파(白坡)스님의 선론을 논박했다. 이에 다시 설두유형(雪竇有炯:1824-1881)스님이 초의의 선론과 홍기의 선론에 반해서 선원소유(禪源溯流)를 써서 백파(白坡)스님의 선론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 논쟁은 무려 반세기 이상을 끌고 오는 동안 초의스님의 편에 선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이 논쟁에 참여 했고 다시 논쟁의 불꽃이 어느 정도 꺼졌다 싶을 때 속리산 법주사의 축원진하(竺源震河)스님이 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을 써서 다시 들먹였다.

이와같이 조선조 말기에 일어난 선의 논쟁은 한국불교선종사를 재확인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하튼 초의스님의 사변만어는 전적으로 선문수경을 논박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지마는 초의스님이 고수하려는 선론이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나라 선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논쟁점의 골자만을 간추려 본다면,

첫째로 임제삼구(臨濟三句)를 백파(白坡)스님은 제 1구는 조사선(祖師禪)이오, 제 2구는 여래선(如來禪)이요, 제 3구는 의리선(義理禪)이다 라고 보고, 초의스님은 제 1구는 조사선(祖師禪)이오, 제 2구는 여래선(如來禪)이나, 제 3구는 의리선(義理禪)이 아니라 제 1구와 제 2구의 「병본구(병本句)」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같이 임제 3구를 삼종선(三種禪)으로 보는 백파(白坡)의 견해를 비판하며, 제 1구나 제 2구를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보는 것은 인정하나 제 3구를 의리선으로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하며, 이는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병본(병本)」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선문오종(禪門五宗)인 임제종(臨濟宗). 운문종(雲門宗). 조동종(曹洞宗). 위앙종(僞仰宗). 법안종(法眼宗)을 각각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에 배정하고, 그외 오종선문(五宗禪門)에 들지 못하는 북종(北宗)의 신수계(神秀系), 우두종(牛頭宗)의 법융계(法融系), 하택종(荷澤宗)의 신회계(神會系)를 의리선에 배정한 것이 잘못이다 라고 초의스님은 비판했다.

셋째로, 초의스님은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의 의미규정을 백파(白坡)스님과 달리하고 있다. 백파스님은 이를 「근기(根機)」의 차이로 보고, 초의스님은 법(法)의 은(隱:祖師禪). 현(顯:如來禪)으로 보고있다.

이 외로 살활(殺活), 기용(機用) 진공(眞空) 묘유(妙有),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劒)등에서도 다른 견해를 보여 사사건건 반론을 제기하며, 백파(白坡)스님이 변고이상(變古易常)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초의스님의 선론은 평소에 교(敎)에만 치우치지 않고 그렇다고 선(禪)에만 기울지도 않는 독특한 「지관(止觀)」법(法)으로 수행했다고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관(止觀)이란 지(止:Samatha)와 관(觀:Vipasyana)의 합성어로서, 지(止)는 일체의 경계를 끊어 버리고 조금도 분별하거나 헤아림이 없는 것을 말하며, 관(觀)이란 이세상 모든 사물이 지니는 본질적인 본분(本分)을 깊이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치지(지:止) 않으면 정(定)에 들 수가 없고, 보지(관:觀) 않으면 지혜(혜:慧)를 얻을 수 없다. 이같은 지관법은 「선교병수(禪敎幷修)」로서 처음에 교(敎)에 들고 나중에 선(禪)에 드는 초심자의 수행지침으로 한동안 우리나라 불교계를 지배해 오고 있었다. 이 사상은 일찌기 원효(元曉)나 중국(中國)의 천태(天台)와도 같은 사상이며, 고려의 의천(義天:敎觀幷修)이나 지눌(知訥:定慧雙修)도 이같은 주장을 했으며, 조선의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그의 제자들도 다 택했던 수행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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