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의 파도가 휩쓸고 간 피난민의 도시 부산에서 미국의 유명한 흑인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의 공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다. 휴전을 2달 가량 앞둔 1953년 5월 28일이었다. 미8군의 요청으로 마리안 앤더슨은 피아니스트 후란츠 루프(Franz Ruff)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내한하였고, 이날 대청동 제3육군병원 앞 뜰 야외에서 한국음악협회 주최로 루프의 반주로 마리안 앤더슨의 무료 공개 공연이 있었다. 어수선한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공연장을 찾지 못해 초등학교가 인접해 있는 가설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공연은 오후 6시 시작되었다. 이날 공연은 전화로 지친 고난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병원 야외에 설치한 가설 무대에서 진행된 무료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고 대청동·보수동 거리를 메운 인파는 발디딜 여지도 없었다고 하니 이날의 열화 같은 성원을 헤아릴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콘트랄토 앤더슨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1800년대 말 미국 필리델피아에서 출생하였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교회에 다니며 6살 때부터 성가대에서 활동하며 음악성을 키웠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28세 때는 300여 명의 기라성 같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로 뽑혔고, 성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식당에서 거절당해 주린 채로 무대에 서기도 했고,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컨스티튜션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흑인이란 이유로 연주장 임대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이 때 앤더슨은 항의의 표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강행 했을 때 무려 7만 5천명의 청중이 운집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딛고 일어선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로 사랑을 받았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앤더슨을 가리켜 “100년에 한 명 나올 수 있는 성악가”라고 극찬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을 위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국가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저명한 성악가가 1953년 대청동, 보수동 거리에서 1만명을 앞에 두고 위로의 멧세지를 전했던 일은 감동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그가 불렀던 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두곡은 알려져 있는데, 한 곡은 지금 찬송가 372장에 편집되어 있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이고 다른 한 곡이 ‘깊은 강’이었다. 어디서든 흑인영가를 즐겨 불렀던 그는 고난의 현장, 전쟁의 아픔을 안고 하루를 마감하는 부산시민들에게 위로의 멧세지를 노래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 두 노래는 앤더슨이 불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흑인영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황폐한 거리에 울려 퍼졌던 이 노래가 지금도 우리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 준다. 이 노래는 세계적인 가수가 불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노래 자체가 앤더슨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고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 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다시 부른 노래가 ‘깊은 강’이었다.
“깊은 강, 내 집은 저편 요단강 너머에 있네. 주여, 저 강을 건너 그리운 땅으로 가고 싶네”(Deep river, My home is over Jordan, Lord, I want to cross over into campground)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고난의 현실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자유와 행복을 갈망하는 노래였다.
가사나 곡은 슬픔을 당한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위로의 멧세지였다. 이날의 모습은 상상만해도 가슴 물클한 감동이 있다. 윤이상은 '국제신보' 1953년 5월 30일자에 이렇게 썼다. “싸우는 우리의 지식인이나 젊은 남녀들은 당신의 내한을 환영합니다. 우리 모든 것을 잃고 싸움에 지친 한국의 백성들은 당신의 노래를 듣고자 합니다. ... 당신이 홀연히 찾아온 이 이름 없던 땅덩이에 아직도 비극을 걸머진 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백성들의 모습을 당신은 보십니까? ... 이 가난하고 숙명적인 백성들에게 주는 당신의 선물은 오직 당신의 아름답고 정다운 노래일 것입니다.”
어떤 기자가 마리안 앤더슨에게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 그 때가 공연료를 처음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흑인이라는 멸시와 가난,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어왔기에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는 노래와 요단간 건너편에 있는 평화의 나라에 대한 애절한 노래는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리안 앤더슨은 1958년 10월 다시 한국을 찾았고 그 때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었던 이화여전 강당에서 노래 불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감동의 무대였고 앵콜 송으로 '아베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앤더슨은 1993년에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