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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281 작성일: 작성자: 김승철 / 조회 1,922
흰 바람벽이 있어

 

바람은 이중의 벽 속에 갇혀있다


흰∥ 바람 ∥ 벽


시인의 가슴 속에 가득한 바람은 대기를 따라 휘돌지 못한다.

그 바람은 '흰'과 ‘벽’으로 막혀있다.

하얀 눈처럼 여전히 남아 있을 '순수'의 열정은 언제나 현실의 벽을 마주하여 소용돌이로 가뭇해진다.

바람은 순수와 '현실'의 양 측면에 기대어 미동도 못하고 있다.

그런 바람이 무엇을 꿈꾸는 걸까?

바람이 머무는 순간, 갇히는 순간 이미 바람이 아닐진대...

그러나 이미 그 벽은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로 막아놓아야 했을 휑하니 뚫린 벽이다. 어쩌면 그 뚫린 창호지 벽은 그를 자유롭게 할 통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곳으로 그는 어느 새 쓸쓸한 바람이 불어옴을 느꼈을 게다.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것일까?

희미한 전등 촉이 밝혀진 하얀 벽 창에는 삶의 피로와 외로움과 쓸쓸함과 배고픔이 비쳐있다. 그런 그를 달랠 것이 무엇이 있나? “달디 단 따끈한 감주 한 잔”이면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이 행복할 텐데....

아서라, 그것도 과분한 욕심이어라. 그에게는

'내 가난한'이라고 두 번이나 애처롭게 불러대는 어머니,

'내 사랑하는'이라고 애달피 어루 만져보는 어여쁜 사람,

그 에미가 '옆에 끼고' 강아지 마냥 챙겨 먹이는 어린것,

그들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그를 다시 무능과 자책감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슬프지만 그들이 그를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치 거울처럼 보이는 '흰 바람벽'에는 언제나 그의 쓸쓸한 자화상이 비친다. 흰 바람벽 위에는 성경의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의 향연에서 나타난 문자들처럼 그의 운명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상처받은 꿈들은 그 거울 위에 아련하게 펼쳐진다. 거기에는 얼핏 행복의 그림자도 스쳐간다. 언젠가는 '바람벽'이기에, 뗄 수 없는 현실의 거리는 '바람' 그리고 '벽'으로 분리되어, 다시 내적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 '흰바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의 꿈은 흰바람으로 이 세상과의 이별을 고하는 것일까? 아니면 바람의 자유로움을 생각하는 것일까?

가난과 외로움과 쓸쓸함에는 그를 위한 한마디 스치는 바람이 지나간다 : "높다".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한 그는 높고도 높다. 그는 희고도 희다(白).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태어나고 운명 지어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그를 이해하는 이는 오직 '하늘'뿐인가?

아니다! 아니다.

초생달 바구지꽃 짝새와 당나귀, 그들 자연과,

오로지 높고 가난한 것들을 사랑하는 영혼들 : <흰바람>.


'프랑시스 잼'이라고 말하는 그의 언어는 이제 겨우 말을 배운 아이의 발음처럼 귀엽다. 잼, 쨈, 그 시대를 살았던 이의 문화적 허기는 이 말에 담겨져 있다. 쨈. 무지와 허기.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 그의 시를 하나 읽어보자.


고양이는 불 옆에 있고...


고양이는 불 옆에 있고 냄비가 끓고 있다.

어두운 이 부엌.

붉은 소시지 두 개가 오래된 검은

나무 막대기 끝에 걸려있다.


안뜰을 면한 창문들의 어두운

유리 위로 비 내리고,

그 어두운 유리창 밖에서

달리듯 내리는 세우(細雨).


이 어두운 부엌, 벽난로 불등걸 옆에

나는 까만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를 그리고,

그녀와 입 맞추리.


그리고 검은 벽난로 위에서는

가스등이 빛나고 있으리...

목을 가르릉대는 내 상냥한 꼬마 고양이마저

까맣게 보인다.


부엌 바닥의 붉은 타일은 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불 옆에 쌓여 있는 검은 포도 그루터기들.

벽난로의 장작 받침대는 녹슬어 있는데,

어두운 이 부엌.


그러나 검게 탄 장작 옆에

슈미즈 속의 너만은,

모두가 검은 이 부엌에서 너만은

희리라. 희리라, 희리라, 희리라.


이런 프랑시스 잠을 사랑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사랑하는 영혼. 그는 누구인가? 구멍 난 바지를 멍하니 바라볼 때, 푸른 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이 시를 읊조린다. 그리고 그는 행공을 한다. 그는 먼데를 바라본 채 명상에 잠겨있다. 아마 매에 들었나 보다.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의 시선은 어딘지를 모를 곳과 높이에 머물러 있다.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바람처럼 머물지 않으므로 가난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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