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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282 작성일: 작성자: 김영복 / 조회 1,805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 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니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 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 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듯이 나를 올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정본백석시집pp151-153/흰바람벽이 있어/ 백석_고형진엮음/(주)문학동네/2007


*때끌은 ---때에 묻어 검게된
*생각하는내---생각하는 동안
*앞대---평안도에서 보아 남쪽 지방을 가리키는 말
*개포---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이즈음에 이르러
*올력---여러사람이 함께 힘을 합하여 일함
*눈질---눈으로 흘끔 보는것
*귀해하고---귀하게 여기고
*바구지꽃---박꽃
*짝새---뱁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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