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체험담

 >  공개수련  >  명상체험담

번호 : 961 작성일: 작성자: 鎭堂 김지영 / 조회 935
육임신문이 나에게 준 지혜
     

육임신문을 왜 공부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육임신문이 나에게 지혜를 준다고 대답하겠다. 어떤 지혜인가? 나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지혜, 나 자신을 통일시킬 수 있는 지혜이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은 몸과 마음이 같이 간다는 생각이다. 한때는, 즉 젊었을 때는 분명 마음이 먼저 앞섰다. 사상과 이념이 중요했고 행복은 마음의 문제라고, 곧 욕심을 내려놓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마음에 영향을 준다. 아무런 이유가 없이 몸이 불안하고 따라서 마음이 불안하다. 전체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고 약한 진동 속에서 파르르 떨면서 움직인다. 왜 그럴까?


혹시 어릴 적에 몸의 상태가 불안하여 그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릴 적에 까탈스러웠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기들을 보라. 어떤 아기는 편안히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잘도 자는데, 어떤 아기는 뭐가 불편한지 얼굴을 찡그리며 칭얼대며 잔다. 나는 후자의 아기가 아니었을까. 전반적인 불편함, 불안함. 아기가 세상일로 불편할 리는 없다. 기본적인 욕구와 엄마의 보살핌이 아기의 세계 전체이다. 우리 어머니의 성정으로 보아 내가 배고플 때 젖을 안 주셨을 리 없다. 내가 칭얼대면 그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보려 무진 애를 쓰셨 것이다. 아기의 욕구와 엄마의 보살핌은 항상 일대일로 100 퍼센트 일치하지 않는다. 어쩌면 언제나 엇박자로 엇나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통계상 나오기 때문에 아기는 그런대로 잘 크고 엄마는 육아법에 대해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확률상의 일치이지, 본연의 일치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불확실성 속에서 확률상의 작은 일치감만 가지고 잘 커왔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느끼는 세계와 자아의 불일치,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 지식과 진리의 불일치가 언제나 마음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것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인데, 매번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삶이 서투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도 줄지 않고 늘어나는 빚은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언제나 빚진 인간이며, 이는 신에게 빚진 인간이라는 종교의 다른 판본이다"고 한 발터 벤야민의 말이 실감나는 증거이다. 또한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는 내가 육임신문이라고 말할 때 그 말에 대응하는 사물이나 사건의 실체가 모호하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는 점에서 언제나 나를 간질거리고 좌절시키는 대목이다. 진리와 지식의 불일치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동시에, 내가 과연 진리를 알 수 있는가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무능력을 야기하기에 이도저도 못하는 아포리아(막다른 골목, 난제)로 몰고간다. 이러한 불일치들이 나의 불안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무척이나 형이상학적이고, 쓸데없이 생각이 많으며, 혼자 놀고 있다고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불일치가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요소가 된다고 믿으며, 어느 정도는 다들 이러한 불일치에서 나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르고 따라서 삶의 가치관이 달리 형성되겠지만 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내가 육임신문을 공부하면서 느낀 가장 큰 매력이 이러한 불일치를, 분열을 없애는데 특효가 있다는 점이다. 생각이 뭉게뭉게 일어날 때, 그 생각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을 내려놓고 기에 집중하라고 한다. 이는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 때, 왜 떠드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하세요"하면서 고요를 만드는 것이다. 혹자는 원인을 알아야 치유할 수 있지 않느냐며 조용히 하라고 억압할 게 아니라 왜 떠드는지 원인을 알아야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험상, 떠드는 이유를 댈 것 같으면 한도끝도 없이 바글바글 소란은 더 커지고 마침내 지쳐서 침묵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침묵이 목적이라면 바로 침묵에 들어가는 효과적이다. '생각을 멈추고 기에 집중하세요." 생각을 멈추는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기에 집중하는 것도 두뇌의 일인지라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다른 것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집중의 대상은 기이다. 


기가 무엇인가? 나는 기란 물질을 추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몸의 이분법을 벗어날 때, 우리는 추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도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즉, 나의 정신이 물질을 대상으로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추상한 기에 우리의 정신이 감응하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비슷한 것 같지만 확연히 다르다. 전자는 형상과 질료처럼 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재료가 되어 정신이 물질을 요리한다고 간주한다. 반면 후자에서 정신은 물질에 감응하고 소속된다(belong). 나는 바다에, 바람에, 나무에, 바위에, 별에, 하늘에 속한다. 내가 속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정신과 물질의 작용은 속함의 문제이므로,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나는 물질에, 기에 속한다. "하늘의 영력을 받아라" 할아버지께서 명령하신다. 하늘의 영력이 뭐지? 영력을 어떻게 받는거야? 영력이 어디 있지?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겐가? 등의 의문들이 휩쓸고 지나간다. 나와 하늘의 불일치. 나와 하늘의 분리. 이 분리가 바로 자아와 세계의 분리, 언어와 사물의 분리, 지식과 진리의 분리와 함께 작동하지 않은가? 그러한 분리가 있는 한은 하늘의 영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늘의 영력에 속함이 될 때 우리는 하늘의 영력을 받는다. 


그렇지만 어떻게? 여전히 의문의 말들이 튀어나온다. 내가 하늘에 속한다는 것이 나의 환상이라면? 내가 하늘에 속한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지? 여전히 두뇌는 묻고 있다. 그 보장은 하늘과 내가 소통하는 언어에 있다. 하늘과 내가 소통하는 언어, 사람의 말이 아닌 그 언어는 "살아있음"이다. 생명이다. 생명은 모든 생명체들이 소통하는 언어이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살아있기에 생명을 통해 소통한다. 생명이란 언어는 우리가 수시로 까먹는 언어이며, 자연을 대할 때 기억하는 언어이다. 사람이 자연을 대할 때 왜 기쁜가? 생명의 언어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육임신문에서 수련할 때 기쁨은 생명으로 바다와 하늘과 별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은 내밀한 힘, 봄에 솟아나오는 내면의 힘이다. 봄이라고 화훼가게에서 산 작은 화분에서 꼬마장미 세송이가 힘들게 꽃을 피우고 있다. 꽃잎을 열게 하는 장미꽃의 내면의 힘. 불안에 지친 나는 그 생명력을 닮으려고 한다.            

 

 

목록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 :
제목 작성자 작성일

육임신문수련 1년을 앞두고. [4]

허낙병 2018/02/02

# 영주님의 기 체험담 과 청헌 술사님의 기 체험 과 동안... [2]

박 광 2018/01/21

2017년 호박소 수련 [1]

이혜리 2018/01/18

육임신문과의 인연 [6]

손정곤 2018/01/14

♡ 준회원의 졸업을 맞아 ♡ [3]

이병록 2016/09/05

설악수련 체험담 2016. 08. 26 13:00~28 0... [1]

박치흥 2016/09/04

육임신문이 나에게 준 지혜 [5]

鎭堂 김지영 2016/04/01

수련 중간평가 [8]

신성철 2016/01/18

19기 야외수련 [2]

허정식 2016/01/18

내고향 남해 금산 수련을 다녀와서 [4]

김상철 2016/01/18

귀선공 수련기 [3]

鎭堂 김지영 2016/01/12

고무와 아이 [3]

하범준 2016/01/10

병신년 새해를... [6]

정현석 2016/01/09

수련체험기 [2]

김소원 2016/01/09

수련 단상 [2]

최남섭 2016/01/09
Q&A바로가기 수련체험담 수련과정(커리큘럼)